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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J·박근혜 비서실장’ 한광옥의 苦言 ??
    카테고리 없음 2020. 3. 3. 09:42

    [중앙 하나보]입력 2020.0하나.2개 한개 5:52수정 2020.0하나.2개 한개 5:53■"문 대통령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의 보고를 받은 것 아닌가"■"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은 정치 재판... 탄핵까지 가는 하나였던 자신감.


    ■"41.1파.센트로 당선되더라도 100카피.세인트 국민을 봐야 정치가 안되면 원민이 호민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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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광옥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정치 원로로서 무엇보다 국민의 분열이 가장 아프고 안타깝다며 정치권의 각성을 촉구했습니다.'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DJ(김대중 전 대통령). 한 전 실장은 "국가"의 두번째 비서실장으로 발탁되면서 김 전 대통령을 보좌했습니다. 한 전 실장과 DJ의 인연은 38년 전부터. 하나 982년 하나 0월 7일 국회 대국 질문에서 한광옥 당시 밍항당 초선 의원은 DJ의 석방, 광주 진상 연구 및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고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 발언 이후 6개월 동안 정부 정보 기관의 내사(內사)을 받앗슴니다. 군사정권 시절 아무도 못한 이야기를 제가 꺼냈기 때문이죠. 하나 984년 DJ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동교동으로 인사에 가면 나를 작은 방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나쁘지 않다, 가족 모드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저를 "한 동지"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저에게 민추협 대변인을 맡겼습니다."대표적인 'DJ맨'이지만, 한광옥 전 실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도 계속 했습니다. 20하나 2년 새누리당의 대선 캠프에 합류한 그는 국민대 통합 위원회 수석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정부 출범 후도 계속 국민 대통합 위원장직을 수행했습니다. 그 박)국가의 내용 다신 20하나 6년 하나하나 달에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한 전 실장은 20하나 7년 3월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어 권좌에서 내려온 후(후)에서도 청와대에 남아 임무를 완수했고, 같은 해 5월의 정권 교체와 함께 청와대에서 나쁘지 않고 왔다. 월간 중앙이 세계 정치사에서 드문 '두 대통령 비서실장'한광옥 전 실장과 처음 만난 것은 20하나 9년 7월 하나 8일이야 월간 중앙의 인터뷰 요청에 한 전 실장은 "아내가 하나 0년 정도 폐 암 투병 중이라 내가 ' 수간호사'역할을 해야 합니다"정중히 고사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나쁘지 않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입을 열겠다며 여운을 남겼다. 그로부터 6개월 후(후)의 한월, 하나 5일 월간 중앙이 서울 시내 모처에서 한 전 실장과 다시만 나쁘지 않다. 90분간 진행된 인터뷰에서 한 전 실장은 구체적인 거론(거명)은 자제하면서도 나쁘지 않다고 와서 국민을 걱정하는 격정(격정)는 거침없이 토로했다. 그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대통령의 불행은 나쁘지 않은 불행이고 국민의 불행이라며 입법부-행국-사법부를 모드 제압한 현 정권이 제도적으로 독주체제를 만들었는데 폭주로 이어질까 봐 걱정이라고 개탄했습니다. 대통령의 내용, 국민과 그만큼 괴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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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1월 181청와대에서 열린 신입니다 정무에요 명장 수여식에서 보낸 그 때 박근혜 대통령과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아내가 폐 암 투병을 하고 10년쯤 됐다. 젊었을 때 정치를 할 생각입니다라고 돌아다닐 때 아내를 괴롭혔다. 그래서 요즘은 부인을 많이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남았을 때에는 과거의 동지들과 만본인서 조언을 하거나 듣거나 할 것입니다. 제가 노사정위원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입니다.의장·국민대 통합 위원장 등 다양한 1을 해서 그런지 맨 봉잉소 이야기, 본인 누루인도 많을 것 같다."청와대를 자신의 온 지 3년 가까이 됐다. 청와대 밖에서 바라보는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입니다. 명시하고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지만 본인은 정치가이자 본래의 참모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청와대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늘 우리 정치사회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청와대가 경직되고 권위적으로 변화하는 것 같다. 대통령의 말이 본인의 청와대 논평을 보면 국민과 당이 무분별하게 괴리돼 있다는 소견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 국민을 보면 그렇게 분노할 게 없는데 (소견이) 좀 지나치지 않나 싶을 때가 있다. 국민이 분열돼 있으니 누군가는 광화문에 가고 누군가는 서초동에 가서 집회를 열지 않는가. 이런 갈등을 보면 당신 가슴이 아파요. 많은 사람이 마음에 하는 것 중 하봉잉카'DJ맨의 한광옥'이 어떻게 박)나라에서 1 하게 됐느냐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가 모신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정치는 상대방을 포용해야 하거든요.소견을 갖고 있던 분이었다 백인에게 오랫동안 탄압받은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같은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 생전에 김 전 대통령은 만델라 같은 정치를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용과 용서가 DJ의 정치철학이었다 2004년 그 때 박근혜 한 봉의 라단 대표가 동교동을 방문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아버지 시절 여러가지로 피해를 보고 고생한 것에 대한 딸로서 사과 말씀 드린다. 또 김 전 대통령이 재입니다. 안에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결정한 데 대해서도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DJ는 기념관 사고를 푸는 데 가장 큰 정적인 내가 적이라고 소견했다. 역사적 공과(공과)은 공정하게 평가할 국민을 위해서도 좋은 1이었다 본인은 동서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못한 1를 박 대표가 한다. 박 대표가 제1죠크노'과 인사했다. 박 대표가 방문한 뒤 DJ가 자신을 불러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과를 받은 것 같다고 매우 나빴던 기억이 새롭다. 그 1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면적으로는 화해했다.박국의 질서 있는 퇴진을 위해 비서실장직 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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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일년 8월 청와대의 한 행사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이이에키를 나누고 있는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20일 2년 대선 때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캠프에 합류했는데. 사실 김용환 전 의원의 권유가 있었다. 선배는 한 997년 DJP(김대중 김종필)연합 때 일년 5개월 정도 함께 협상을 진행하면서 인간적으로 신뢰를 쌓는 것이었다.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선배였다. 그분이 저에게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국민 대통합 위원회도 맡아 박근혜 후보도 도왔으면'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국민통합을 위해서라면 하겠다고 답했다. 박근혜 후보는 이전에 동교동에서 찾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과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잘 모르는 사람은 내가 전환한 날 갑자기, 박근혜 후보 캠프에 드는 것을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일을 갑자기 떠맡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과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 김용환 전 의원, 박근혜 후보와 셋이 만난 자리에서 예기를 나눴고(박근혜 후보 캠프 참여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20일 6년월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박근혜 퇴진론까지 고개를 들을 때가 아니었던가? 당시 국민대통합위원장으로서 이 사건이 남아 있을 때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주변에서 당신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을 도와 달라는 권유도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직전의 비서실장이던 이원종 전 실장이 '차 한잔 한다'과 해서 만나고 이이에키을 나누고 있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 동석하고' 도왔으면'고 하더라. 기본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도와야 합니다라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지켜온 나의 철학이었다. 이는 다른 예기가 내가 새 천년 민주당 대표 시절 노무현 후보가 새 천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 슴니다. 당시 국민경선제를 도입하지 않았다면 이인제 전 의원이 대선후보로 선출되지 않았을까. 대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이기기 위해 그런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열린 우리당을 만들어 당을 허물고 나오고 말았다. 그 때부터 나와 사이가 틀어졌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가 이렇게 갈라졌는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5년 단인 대통령제도 문제다. 4년 인연이다제라 면 4년을 가하기 때문에, 앞선 4년간 열 한층 더 하겠지. 그런데 5년 단이다 나는 잘하든 못하든 5년 후에는 내려야 하니 끝에 막장이 되어 버린다. (대통령의) 친인척이나 참모 중에 불행한 사람이 나오는 이유도 같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아들들 때문에 마지막으로 잘못된 것 아니었던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새 천년 민주당)탈당 원서를 받은 사람이 바로 나온다. 그 감정을 누가 알겠는가. 그런 것을 경험한 때문, 5년 단이다 제안했다는 스토리울 맞은 박근혜 전 대통령도 도와야 한다고 훈계하게 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물러나더라도 평화롭고 질서 있게 물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일을 돕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국민의 입장 생각한 3금에 배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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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한살 9월의 아시아 게이야 "성공을 기원하는 여덟 관회"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당시 이회창(이·후에챠은)한나라당 총재, 한광옥(한·그아은옥)새 천년 민주당 대표, 김종필(김·죠은필)자민련 총재(왼쪽부터).지근(최근)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시중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고 괜찮아? " 짧은 기간(4개월) 맞다 보니 솔직히 말하면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화단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화가 어려운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에게는 가끔 불평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분의 국가관은 매우 투철했다. 그런 면에서 나쁘지 않고 나름대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여러 방면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최서원(예전 최순실) 사고를 알고 있었잖아. 나쁘지 않은 줄 몰랐다. 그래서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 비서들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비서실장이 돼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수석비서관회의 소집 때 최순실 사고는 정확하게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재판에 가서 본 적이 있는가. 물론 가봤다. 정말 감정이 나빴어. 그래도 그분은 의연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꼭 재판을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나. 그걸 내가 어떻게 예상하는지 나쁘지 않니? 또 그건 내 말이 아니라 내 능력 밖의 한 가지였다 다만 나쁘지 않은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은 정치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까지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심판에는 역사적 국민적 법적 심판이 있지만 탄핵까지 받는 대통령은 아니었다는 게 내 소신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75하나하나, 노태우 전 대통령은 768개 수감됐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미 하나 000하나 넘어섰다. 이제는 석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을 받더라도 불구속 상태에서 받도록 해야 합니다.과거 민추협 시절에는 상도동과 가깝고, DJP연합 시절에는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와 자주 만나 반갑지 않다. 3김(금)에 대해서 평가합니다 면.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먼저 얘기하겠다. 민추협은 상도동과 동교동에서 공동 의장을 맡았기 때문(성명서 등을 발표하기)YS(김영삼 전 대통령)과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명이 모두 포함되야 했다. 당시는 우리 집이 관악구 봉천동에서 성명서 1장을 가지고 상도동에 가서 동교동에 갔다는 시대였다. 상도동에 마스크 YS는 항상 문 앞까지 나쁘지 않고 어느 대변인 수고했다며 직접 배웅해주셨다. 인간미가 있었던 사람이야. 정치적으로는 대단한 결단이 있었다. 또 어렵고 복잡한 하나를 단순화시키는 능력도 대단했다. 한번 눈을 감고 뜨니 결론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DJ는 논리적이고 정책적이었다. 물론 DJ도 인간미 넘치는 편이었다. 누구보다도 그분은 포용력이 대단했다. JP는 대한민국 산업화에 공이 큰 분이었다. JP는 정치인이면서 문화적 예술적 감각이 대단했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면 항상 재미있고 배울것이 많았다. 독서량이 굉장했기 때문에 지식이 풍부했다. 특히 고사 성어는 대한민국에서 2번째가 되라고 자탄할 지경이었다. 3금은 노하우그와콤텡츠은 달랐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투철한 자유민주주의적 국가관이었다며 국민 여론을 매우 중시했다. 어떤 하나를 결정할 때 국민이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됐다. 3금이 국민의 여론을 중시하고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했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아주 중요한 말이다라고 강조하고 싶다.라이벌을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는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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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6월 당시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공항 귀빈실을 찾아 인사를 하고 있다.DJP연합은 매우 이질적인 정치세력의 연대였다. 어떻게 그런 프로젝트가 추진됐는지. "DJ는 뛰어난 세번의 대선 도전에서 모두 실패하고 1997년의 마지막 도전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내가 '새정치 국민 회의, 야권의 대통령 후보단 1화 협상 추진 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DJ로서는 전략적이든 정략적이든 다른 세력과의 연대가 절실했습니다. 자칫하면 보수 진영 1코너에서 DJ에 색을 덧씌운 때잖아. 그래서 DJ에게 JP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고로 1996년 봄부터 김용환 전 의원과 내가 물밑 접촉 시작했습니다.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김용환 전 의원과 신뢰가 쌓였다. DJP연합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최소한 1년 5개월 가량 걸린 대장정이었다. DJP연합의 최대 걸림돌은 자민련이 요구하는 내각제였다. 당시 열린우리당에서는 내각제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지율 5퍼센트의 당에 지분의 절반을 허용하면서까지 연대해야 하나'는 불만도 나왔다. 오랜 고민 끝에 어렵게 자민련의 내각제 요구안을 보고했지만 DJ는 나도 얘기지, 사실 내각제가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다 내각제를 전격 수용했고 DJP연합은 급류를 탔습니다. 정당의 입장에서 대선 후보를 양보한다는 것은 간단한 1이 없다. 자민련으로서는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 민주 연합은 79석에 그치고 DJ의 대선 가도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이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싱크 탱크였던 아시아 외교 태평양 평화 재단(아시아 외교 태평양 평화 재단)이강래 상임 고문이인 것(마 나 팀)고립 타파책으로 JP와의 연대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안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당시 한광옥 사무총장에게 특명을 내렸다. 한 사무총장의 자민련 쪽 파트현 씨는 김용환 사무총장이었다. DJP연합 합의 야키웅 ▷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에 초대 총리는 김종필 총재 ▷ 제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합의하고 실세형 총리 ▷ 경제 부처의 임명권은 총리가 갖고 지방 선거, 수도권 광역 단체장 중 한명을 자민련 소속 등이었다. 현 정권의 사고점으로 캠프 정치와 편 가르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매우 높다. "사실은 편 가르기라는 건 정치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1이 아니다. 독 1의 정치 이론가인 카를 슈미트는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슈미트가 말하는 적은 선의의 라이벌을 의미한다. 적이라고 해서 악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적의 개념과는 다르다. 가장 최근의 한국 정치는 동지=선, 라이벌=악으로 보고 있다. 이런 논리를 대입해 보면 요즘 한국 정치는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그렇게 양분화됐기 때문에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으려는 것이었다. 조국사태 이후에도 서초동에 간 사람은 그쪽 사람들 말만 듣고 광화문에 간 사람은 또 그쪽 사람들 말만 들으려고 한다. 현 한국정치에서 진영정치는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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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998년 2월 대타협 콤동하품은지에울 발표하는 노사정 대표. 왼쪽부터 당시 이다창열 경제부총리, 김창성 대한민국경영자총협회장, 한광옥 노사정위원장, 박인상 민주노총 위원장,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캠프 정치의 원인으로 친노-친문의 자치자신-친동류의식이나 패권주의를 꼽는 사람도 있다. 친노든 친문이든 그들의 진영논리가 현재 국가의 분열을 초래한 게 아닌가 싶다. 쟈싱눙 40여년 동안 정치를 해왔는데 아시아, 요즘처럼 갈라진 적을 하나칙이 본 적이 없다. 집안에서도 부모자식이 헤어진다고 말하지 않으면 신. 한쪽에서는 지상파 방송만 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유튜브만 보고 있어. 쌍방의 발전 다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감이 없어 원하는 쪽 말만 들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빨리 해소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라고 의견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정치가 올바르지 않아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 국민은 현명하다. 최근까지 우리 자신이 걸어온 길을 보라. 고비 때마다 국민이 바로 잡아줬다. 586(50대, 자신이 80년대 학번, 60년 대생)만이 민주화 운동했다고 신? 자신도 60년대 학생 운동하고 두번 이쟈싱 형무소에 들어갔다. 그것이 (민주화운동 경력이) 마치 대단한 훈장처럼 자신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논리가 절대적인 것처럼 만드는 것은 곤란하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국가를 모두 장악했는데 그러면 절대 권력을 누리겠다는 것인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모르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이 왜 있는가. 서로 견제하라는 것이다. 그치만 그런 절대 권력을 쥔다면...."87년 민주화, 다음 요즘처럼 여야의 대립과 반목이 심한 때가 있었던가. (손사래를 치며) 없었다. 얼마 전에도 여야간 정쟁은 있었지만 대화는 했어요. 대화라는 것은 서로 진심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정치가 되지 않는다. 아침에 국회에서는 싸우더라도 night에 음식점에서만 자기 소주를 마시며 서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다들 정치적 이유도 있을 것이고, 진영 논리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서로 협치를 통해 문제를 풀고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국민의 국가에서 내가 노사정위원장으로 하나 할 때 하나 만들자고 소개한다. 간신히 합의했으나 기자 회견 30분 전에 민주 노총에서 '안 된다'고 하더라. 따라서 내가 민주노총에 국가가 있어야 기업이 있다. 기업이 있어야 직장도 있다. 국가가 부도나면 기업이 없어지고 직장도 없어진다. 그러니까 같이 살자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노사정 대타협이 탄생한 것이다."한개 달 하나 4가지 문제인 대통령 연두 기자 회견을 보았는가? 대통령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 내용의) 보고를 받지 않을까 걱정됐다. 이미 제도적으로 독주할 수 있게 돼 있지만 이런 의견을 피력하면 폭주로 이어질까 두렵다.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경제는 물론 정치 갈등도 너희들의 무관심이다. 요즘 우리 국회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대통령은 현실을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귀를 열고 진지하게 감정해야 한다. 또 무엇보다 대통령은 정직해야 한다.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할 것이다. YS(김영삼 전 대통령 자신, DJ(김대중 전 대통령)도 아이들이 문제를 한모금개 꺼냈을 때 사과하지 않은 자신감. 대통령은 국민의 대통령이었다 4개.하나%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더라도 국민, 하나 00%를 보고정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4개.1%만을 보고정치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것이 바로 진영정치다. 대통령은 눈물로 호소할 것은 눈물로 호소하고, 국민에게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국민 앞에 떳떳하지 못한 이유가 뭐냐 정략적 거버넌스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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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0월 31일 DJP합의문을 발표하면서 한광옥 당시 새 천년 민주당 사무 총장(오른쪽)와 김용환 자민련 사무 총장.그이츄규은 총리는 인사 청문회에서 '4.15총선 후 대통령에 여야 협력 정치 내각 구성을 건의하는 '로 했습니다. 협치 내각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일까. 귀추균 총리가 정부와 국민을 위해 친절히 대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다만 협치가 어느 한 쪽의 정략에 따른 것이라면 안 하는 게 낫다. 협치를 하려면 각 당과 충분히 대화하고 분위기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야당에 장관직 하본인을 맡아 달라는 식이라면 정략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 그런 거버넌스라면 안 하는 게 낫다. 제가 노사정위원장일 때 정 총리가 위원으로 일했어요. 따라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 성격이 온화하고 자세가 유연하기 때문에 총리로서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와대 비서실장은 어느 자리인가. "1999년 가을 어느 일요일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날 청와대에 잠깐 들어가서 달라고 하시더라. 청와대에 들어가면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합니다. 그 당시 국회 의원 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6달밖에 안 된 때 솔직히 비서실장을 맡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하는 스토리지만 본인도 자기 영역에서 리더가 되고 싶었지만 참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웃음). 그래서 대통령에게 "1주일만 여유를 줘라. 지상민에게 이야기 해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이 이미 눈치를 채고 아니요, 내일부터 바로 출근하겠습니다. "공관은 비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다 비서실장을 맡게 됐다. 당시는 옷로비 사건으로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대통령 비서실장직을 수락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다. 비서실장은 정치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의 참모일 뿐입니다. 비서실장의 모든 행위는 대통령을 통해 밝혀져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과 수석비서관들, 또 수석비서관들간의 조화로운 분위기 조성에도 앞장서야 합니다. 때로는 대통령을 위해서 직언도 아끼지 않으면 안됩니다. 호랑이가 호랑이의 위세를 부려도 안 된다. 그러나 어떤 수석비서관들은 자신들이 직접 언론에도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 건 안 되겠어. 비서들이 본인에 서 있으면 내각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할 일이 없어지다 내각이 일을 잘하도록 돕는 것도 비서들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옷 로비 사건은 1999년 그 당시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던 신동아 그룹 최순영 회장 부인 이효은쟈 씨가 남편의 구명을 돌리고 인사 부인들에게 비싼 옷 로비를 벌인 사건을 예기합니다. 이 사건 연구를 위해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가 도입됐다. 정부도 국회도 헌법정신 재확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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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999년 3월 30일 실시된 서울 구로 을 국회 의원 보궐 선거에서 당선하던 그 시절 새정치 국민 회의의 한광옥 후보(가운데).20대 국회가 사상 최악이라는 비판이 많다. 정치 선배로서 조언이 있다면. 나쁘지 않아도 이런 국회는 아내 sound 봤다. 20대 국회는 앞으로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것 같다. 이런 국회로 전락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민주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민주주의자가 되는 관행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은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데 정치권은 국민의 정치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 패스트 트랙(신속 처리 안건을 처리하겠다며 4+일련 합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카당키 나쁘지 않도록 한 것? 군소정당이 선거법을 고쳐 몇 석이라도 더 얻기 위해 더불어민주당과 야합하는 바람에 그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그런 정치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인들은 포퓰리즘(대중유행영합주의)을 경계해야 한다. 표를 얻기 위해 포퓰리즘에 빠지면 결국 독재에 흐르게 된다. 요즘 자세히 보니 세금으로 돈을 나쁘지 않고 나눠주는 걸 나쁘지 않다고 하더니 아무도 귀엽지 않다. 그게 나쁘지 않으면 우리도 베네수엘라도 나쁘지 않고 아르헨티나도 나쁘지 않게 될 수 있다. 정치인이라면 정치를 왜 할 것인지 반드시 정치철학이 있어야 한다. 정치는 국가 사회 약자를 위해 해야 한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직업으로 생계형 국회의원이 되려 해서는 안 된다. 자세히 보면 자신의 철학으로 무장한 시의원 도의원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더 큰 기회를 줘야 한다. 마쓰시타 정경숙이라는 형태가 아니라도 정당 산하에 연수원을 만들어 정치인을 키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총선이 되면 갑자기 쇼처럼 바깥에서 영입 경쟁을 벌인다. 그것을 보는 국민은 들끓는다. 여기서 한 전 실장은 허균의 '호민론'을 역설했습니다. "국민에게 항민, 먼 민·호민다는 3가지 종류가 있다. 잘 예쁘지 않고 나쁘지는 않다 보동복종하는 것이 항민이고 원망만 하는 것이 원민이다. 호민은 바꿔야 한다고 나빠지고는 있어. 요즘처럼 정치를 잘못하면 항민이 원민이 되고 원민이 호민이 된다. 우리 국민은 이미 항민을 너무 멀리 떠나 원민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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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광옥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행정부와 국회가 헌법정신에 맞는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감정에 새기고 있다 잠언이 있는가. 상선약수와 해불양수 그리고 덕치정도라는 예기를 깊이 새기며 살아간다. 최고의 선은 물입니다 바닷물은 겸손해 모든 물을 마다하지 않고 쓸데없이 본인의 정체성인 짠맛을 잃지 않는다. 역시 정치는 덕을 갖고 바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결심에 대해 알고 싶다. "오통돗 내 자신도 80세에 다가섰다. 앞으로는 후배들이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버팀목 역할을 하고 싶다. 영화에서 주연만 중요하지 않고 조연도 중요하다. 훌륭한 조연은 주역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 역시 정치인 40여년 보냈지만 아름다운 퇴장을 돌리고 결말도 잘하고 싶다.인터뷰가 끝날 무렵 한 전 실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꼭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행정부는 헌법을 다시 읽어 보고 헌법정신에 맞게 자신을 이끌어 달라. 국회도 마찬가지다. 국회는 행정부 부속기관이 아니다. 국회도 헌법정신에 맞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문 채 경호 월간 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사진의 박종근 비주얼 에디터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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